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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터넷 그 자체를 넘어서는 인터넷의 한 가지 영향, 즉 문화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대한 인터넷의 영향에 관한 책이다. 인터넷은 문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고 있으나, 그 변화가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 못하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그 변화는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하나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제대로 인식하기만 한다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 변화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터넷이 초래하는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기는커녕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상업적 문화'와 '비상업적 문화'를 구분하고, 그 각각에 대한 법률적 규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업적 문화'라는 말로 내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문화 가운데 만들어진 다음에 팔리거나 팔기 위해 만들어지는 문화다. 그리고 '비상업적 문화'란 그 밖의 나머지 모든 문화를 가리킨다. 노인이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비상업적 문화다. 노아 웹스터(Noah Webster, 1758~1843, 미국의 사전편찬자-옮긴이)가 《독본(Readers)》을 출간하고 조엘 발로(Joel Barlow, 1754~1812, 미국의 시인-옮긴이)가 시집을 펴낸 것은 상업적 문화다.
미국의 역사 초기에, 그리고 미국의 모든 전통 속에서 비상업적 문화는 기본적으로 규제되지 않았다. 물론 외설적인 이야기를 퍼뜨리거나 평화를 해치는 노래를 부를 경우에는 법률이 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상업적 문화의 창출과 유포에 법률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법률은 비상업적 문화를 자유롭게 그냥 놔두었다. 옛날이야기나 소설의 내용을 서로 말해주고, 연극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장면을 재연하고, 팬클럽에 참여하고, 음악을 돌려가며 듣거나 테이프에 녹음하는 등 보통의 개인들이 문화를 공유하고 변형시키는 보통의 방식들에 대해서는 법률이 관여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법률이 초점을 맞춘 문화는 상업적인 창작이었다. 처음에는 조금만, 나중에는 폭넓게 법률이 창작자들에게 대한 인센티브를 보호했다. 그 보호의 방식은 창작자들 각 개인에게 자신의 창작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부여해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부여받은 배타적인 권리를 상업적인 시장에 내다팔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도 창작과 문화의 중요한 일부분임은 물론이고, 그동안 미국에서 점점 더 중요한 부분이 돼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의 전통에서 이 부분이 지배적이었던 적은 결코 없다. 그것은 단지 한 부분일 뿐이었고, 자유로운 측면과 균형을 이루도록 통제되는 측면이었다.
자유로운 측면과 통제되는 측면 사이의 거친 구분선이 이제는 지워지고 있다. 이 구분선이 사라지는 데는 인터넷이 그 배경으로 작용해왔고, 대규모 미디어 산업이 그렇게 되도록 촉진해왔으며, 이제는 법률도 그런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 속에서 처음으로, 개인들이 문화를 창출하고 공유하는 보통의 방식들이 법률의 규제범위 안에 들어가게 됐다. 규제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법률은 그동안 손도 대지 않았던 거대한 양의 문화와 창작을 자신의 통제영역 안에 두기에 이르렀다. '자유로운 문화의 이용'과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한 문화의 이용' 사이에서 균형이 이루어지게 도움을 주던 기술은 이제 더 이상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 결과 우리 문화의 성격이 점점 더 자유문화에서 멀어지면서 허가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변화가 상업적 창작활동을 보호하는 데 필요하다는 이유로 정당화되고 있다. 창작활동 보호주의가 그 동기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뒤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변화들을 합리화하는 보호주의는 과거에 법으로 정해놓은 것과 같은 제한적이고 균형 잡힌 보호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들을 보호하는 보호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비즈니스의 특정한 형태들을 보호하는 보호주의다. 인터넷이 상업적 문화나 비상업적 문화를 만들어내고 공유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데 대해 위협을 느낀 기업들이 단합해서 입법가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보호하는 법률을 만들도록 유도한 것이다.
…(중략)…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인터넷이 계기가 됐다. 인터넷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문화를 구축하고 배양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을 엄청나게 넓혔다. 인터넷의 위력은 전반적으로 문화의 창출 및 배양과 관련된 시장을 변화시켰고, 이 변화는 콘텐트산업(content industry. 음반, 영화, 언론 등 각종의 미디어나 미디어가 전달하는 정보를 소유, 운영, 공급하는 산업을 총칭하는 표현. 콘텐트(content)를 한국에서는 흔히 '콘텐츠(contents)'라고 표기하나 이 책에서는 원서에 씌어진 대로 '콘텐트'로 표기함-옮긴이)분야의 기존 기업들을 위협해왔다. 오늘날 콘텐트를 만들어내고 유통시키는 산업에 대해 인터넷이 갖는 의미는 과거 한때 에이엠 라디오에 대해 에프엠 라디오가 가졌던 의미와 같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의 철도산업에 대해 트럭이 가졌던 의미와도 같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은 하나의 종말이 시작됐거나,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획기적인 변화가 시작된 상황이다. 인터넷과 연결된 디지털 기술은 '문화를 창출하고 키워내는 시장'을 종전보다 훨씬 더 경쟁적이고 활기차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장은 종전보더 더 폭이 넓고 다양하게 창작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고, 그렇게 끌어들여진 창작자들을 종전보다 더 활기차고 다양하게 창작물을 생산해 유통시킬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창작자들은 소수의 중요한 요소들만 충족됐다면 오늘날 실제 창작자들보다 이 시스템에서 평균적으로 더 많은 금전적 소득을 올릴 수도 있었다. 과거의 아르시에이와 비슷한 오늘날의 기득권자들이 인터넷으로 인해 생겨난 경쟁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법률을 활용하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거라는 얘기다.
그러나 내가 아래에서 주장하는 대로, 오늘날 우리의 문화에서는 기득권자들에 의해 법이 이용되고 있다. 20세기 초의 라디오산업이나 19세기의 철도산업에 상응하는 오늘날의 기득권자들은 문화를 구축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새롭고 보다 효율적이며 활력 있는 기술인 인터넷에 대항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법률을 동원해가며 자신들이 지닌 힘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은 인터넷이 그들 자신을 개조하기 전에 인터넷을 개조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작권과 인터넷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쟁이 자기와는 상관없는 다른 먼 나라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낀다. 그리고 관심을 갖고 이 전쟁을 관찰하는 소수의 사람들조차도 그것이 두 개의 단순한 질문, 즉 "해적행위가 허용될 것인가"와 "재산권이 보호될 것인가"라는 질문에만 주로 관련된 것으로 간주한다. 인터넷 기술에 대항해 벌어진 전쟁에 대해 미국 영화협회(MPAA, Motion Picture Association of America)의 잭 밸런티(Jack Valenti) 회장은 "대테러 전쟁"이라고 불렀다. 이 전쟁은 법에 의한 지배와 재산권 존중에 관한 전쟁이라는 틀 속에서 전개됐다. 이 전쟁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재산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면 결정하면 된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 전쟁이 그런 선택의 문제라는 말이 맞다면 나는 밸런티와 콘텐트산업의 편에 설 것이다. 나도 재산권은 존중돼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며, 특히 밸런티가 멋들어지게 "창조적 재산(creative property)"라고 부른 것의 중요성을 믿는 사람이다. 나는 또 해적행위는 잘못된 행위이며, 인터넷의 안에서 이뤄진 해적행위든 인터넷 밖에서 이뤄진 해적행위든 적절하게 조정된 법률에 의해 처벌돼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믿음만 갖고서는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와 훨씬 더 극적인 변화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문제와 변화를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계에서 인터넷 해적행위를 제거하려는 전쟁이 애초부터 우리의 전통에 핵심적으로 중요했던 가치들까지 우리의 문화로부터 제거해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그 가치들은 적어도 미국이 건국된 이후 180년 동안에는 과거의 유산에 토대를 두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구축할 권리를 창작자들에게 보장했고, 국가의 통제나 사적인 통제로부터 창작자와 혁신자들을 보호하는 전통을 형성했다. 미국헌법 수정1조(First Amendment, 1789년에 의회에 제안되고 1791년에 발효된 미국헌법 수정조항-옮긴이)는 창작자들을 국가의 통제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닐 네타넬(Neil Netanel) 교수가 강력히 주장했듯이, 적절하게 균형이 잡힌 저작권법은 사적인 통제로부터 창작자들을 보호했다. 따라서 미국의 전통은 소비에트의 전통과 달랐고, 페이트런(patron, 예술이 직업으로 성립하기 이전의 시대에 권력자, 귀족, 부호 등이 예술가들을 후원하던 것을 가리킴-옮긴이)의 전통과도 달랐다. 미국의 전통은 창작자들이 문화를 배양하고 확장하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널찍한 운신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에 대한 미국 법률의 대응은 인터넷 기술 그 자체의 변화와 결합되면서 창작활동에 대한 효과적인 규제를 엄청나게 강화시켜왔다. 그 결과로 이제는 우리 주위에 있는 문화를 증보하거나 비판하려면, 올리버 트위스트(찰스 디킨스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의 주인공-옮긴이)처럼 먼저 허가를 구해야 한다. 물론 허가가 주어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기존의 문화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독립적인 창작활동에 대해서는 허가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일종의 문화적 귀족주의를 성립시켰다. 귀족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편하게 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편하게 살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떤 형태로든 귀족은 우리의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는 이런 전쟁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기술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디지털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악마화된 것은 믿지 않으니 그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악마로 그리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도덕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어느 한 산업에 대항하는 성전(聖戰)을 촉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바는 인터넷 기술에 의해 촉발됐지만 그 기술의 코드를 훨씬 뛰어넘으며 도리 없이 파멸적일 수밖에 없는 전쟁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이 전쟁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평화의 지도를 그리는 노력을 하고자 한다. 인터넷 기술을 둘러싼 지금의 전쟁이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합당한 이유란 없다. 이 전쟁이 계속되도록 방치한다면 우리의 전통과 문화가 커다란 손상을 입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전쟁의 원인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곧 해소해야 한다. …(중략)…
내가 바라는 것은 상식이 관철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지적재산이라는 개념이 갖는 위력에 대해 점점 더 많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지적재산이라는 개념이 정책당국자들과 시민들로 하여금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문화가 지금보다 더 많이 사적으로 소유했던 적이 결코 없다. 그리고 문화의 이용을 통제하는 권력의 집중이 지금처럼 무비판적으로 수용됐던 적도 전혀 없다.
수수께끼는 "왜 그런가?"다.
우리의 사고와 문화를 넘어서는 어떤 가치와 절대적 재산권의 중요성에 관한 진리를 우리가 드디어 알게 됐기 때문일까? 그러한 절대적인 권리의 주장을 거부해온 우리의 전통이 잘못이었음을 우리가 이제 깨달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의 사고와 문화를 넘어서는 "절대적 재산권"이라는 개념이 현대판 아르시에이들에게 이로운 동시에 우리 자신의 직관에도 부합하기 때문일까?
과거에 우리가 노예제에 반대해 유혈의 전쟁을 벌인 뒤에 했던 것(노예의 해방-옮긴이)처럼, 그리고 지금 우리가 서서히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자유문화의 전통으로부터 급격히 이탈하고 있는 것도 미국이 과거의 오류를 시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가 자유문화의 전통으로부터 급격히 이탈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정치체제가 소수의 강력한 특정 이익집단의 포로가 된 또 하나의 사례일까?
이 문제에 대해 우리의 상식이 극단으로 치달은 것은 실제로 우리의 상식이 그런 극단을 믿기 때문일까? 아니면 암스트롱과 아르시에이의 대결에서처럼 힘이 더 센 쪽의 견해가 더 강력하기 때문에 그런 극단에 직면해서도 우리의 상식이 침묵하는 것일까?
내가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의견은 확고하다. 나는 현대판 코스비 부부들의 극단주의에 대해 우리의 상식이 거역하고 나서는 게 옳다고 믿는다. 나는 오늘날 '지적재산'을 옹호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주장들에 대해 우리의 상식이 반역을 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오늘날 법률은 비행기를 무단침입죄로 체포하는 시골 보안관처럼 점점 더 어리석은 요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법률이 어리석은 주장을 하는 것은 시골 보안관의 어리석은 행위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중략)…
그것은 인터넷이 뭔가 환상적이고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동안 우리의 정부는 그 새로운 것에 대해 대응조처를 취하라는 거대 미디어 기업들의 압력을 받아서 매우 오래된 어떤 것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이 가능하게 한 변화들을 이해하는 대신에, 그리고 '상식'이 최선의 대응책을 결정하도록 시간을 주는 대신에, 그리고 '상식'이 최선의 대응책을 결정하도록 시간을 주는 대신에 우리는 그러한 변화들에 의해 가장 크게 위협을 받는 자들이 법률을 바꾸는 데 자신들의 힘을 휘두르도록,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동안 늘 우리의 모습이었던 것과 관련된 근본적인 것을 변화시키는 데 그들이 자신들의 힘을 이용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우리가 허용하는 것은 그런 그들의 행동이 옳기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추구하는 변화들에 대해 우리 대부분이 진정으로 그래야 한다고 믿기 때문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그들의 그런 행동을 허용하는 것은, 인터넷으로 인해 가장 크게 위협받는 이익집단이 우리를 낙담시킬 정도로 타협적인 법률제정 과정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집단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우리 대부분이 눈을 감고 있는, 이런 형태의 부패가 낳은 또 하나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유문화(인터넷 시대의 창작과 저작권 문제), 로렌스 레식 저, 이주명 역, 2005, p25~35
머리말에서 레식 교수가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를 한 부분을 여기에서 인용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