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1월 15일
조직사회에 희생되는 개인의 주체성
|
(전략) ... 그런데 레이건의 유머러스한 발언 속에는 현대 사회의 특징이 함축성 있게 표현되어 있는 것 같다. 어떤 점에서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는지 검토해 보자.
현대 사회를 흔히 조직 사회, 또는 산업 사회라는 말로 표현한다. 산업 사회라는 별칭은 요즘 탈산업 사회니 정보화 사회니 하는 명칭이 널리 쓰이면서 조금 퇴색한 것 같다. 그러나 조직 사회라는 말은 여전히 현대 사회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아마 그 까닭은 산업화가 더 고도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도 조직이 갖는 절대적인 힘은 여전할 것이라는 추측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점점 더 조직화되려는 특성도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효율성의 극대화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사회가 커질수록 상이한 기능을 수행하는 조직들이 수없이 탄생한다. 그리하여 구성원 개개인을 이리저리 얽매이게 된다.
처음에는 개인의 특성과 강점을 키우기 위하여 짜이던 것이 나중에는 오히려 개인 위에 군림하여 개인을 조직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가려고 한다. 그런 조직이 한두개 정도면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 전체가, 시대의 흐름이 조직화를 절대시하는 분위기를 띨 때, 가뜩이나 이리저리 얽혀서 무력해진 개인은 그런 사회 분위기에 영합하거나 동조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거스르기는 힘들게 된다.
이에 대해 조직을 인간화하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이 튀어나온다. 문제는, 조직이란 것이 어차피 개개인의 다양한 측면을 전체적으로 살려 줄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조직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어떤 면에서의 필요에 의해 엮어지는 국한된 관계이기가 쉽다. 그리고 이런 국한된 인간관계는 인간을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처럼 다루게 만든다. 흔히 쓰는 말로 인간의 기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사태는, 이런 인간의 기계화가 인간관계를 가지면서 생겨날 뿐 아니라, 아예 인간관으로서의 보편적인 철학처럼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의 기계화가 조직사회의 부산물로 생겨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아예 그런 식으로 인간을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정당한 생각인 듯이 사회 전체가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을 지극히 비인간적으로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런 비인간적인 관점이 요지부동의 이데올로기처럼 군림하게 된다.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보통 사람들, 특히 대도시의 갖가지 일터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지닌 공통적인 불만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지위가 낮아서, 혹은 자신이 사회의 지엽적인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왜소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사회의 주류적인 조직에 속한다면 그런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환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현대 조직사회에서는 지위가 높아진다고 해서 또는 영향력 있는 조직에 소속된다고 하여 기계의 부속품과 같은 신세를 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개개인은, 조직의 필요라는 맥락에서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개인으로 얼마든지 교체될 수 있는 그런 존재로서 대접받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기계 안에서도 비교적 큰 구실을 맡고 있는 나사못이 있고 작은 기능을 맡고 있는 나사못이 있는 것처럼, 물론 기계화된 인간으로서 대접받는다고 해도 기능에 따른 약간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큰 나사못 대우를 받느냐, 작은 나사못 대우를 받느냐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레이건이 던진 유머는 이런 현대 사회의 특성을 매우 함축성 있게 표현하고 있다. 보좌관이 대통령 없이도 정부가 정상적으로 운영된다고 보고한 것은 일차적으로 대통령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레이건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 가정이지만, 실제로 그가 암살당했더라도 미국 행정부는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대통령 유고시의 권한 대행자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었을 것이고, 사실상 미국 정부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세계를 움직인다는 미국 대통령도─아니,그래서 더욱 더─순전히 정치적인 맥락에서는 한 부품에 불과한 존재인 것이다.
물론 대단히 중요한 부품이기는 하지만. 즉, 그는 같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수 있는 한 정치인으로 대접받고 있을 뿐이다. 그에게 설령 독특한 개성이나 고매한 인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 대통령이라는 직책 수행과 관련되지 않는 한 별로 눈여겨 살펴볼 요소가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개인을 유일무이한 독자성과 인격을 지닌 존재로서보다는 거대한 사회 안에서 수행하는 기능에 따라 평가한다는 점에서 현대 조직 사회의 비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현대인은 기계 문명이 제공하는 온갖 편리함과 다채로움을 폭넓게 향유하고 있다. 동시에 그에 따르는 개인의 기계화ㆍ비인간화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현대 산업 사회가 갖다 준 기계 문명의 편리성을 극대화하면서도 인간이 기계에 의해 밀려나고 왜소해지는, 이른바 인간의 주체성 상실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전 인류가 진지하게 해답을 찾아야 할 절실한 문제이다.
고정식, <웃기는 철학>, 2005, 넥서스BOOKS, 42~46p
# by | 2008/01/15 14:15 | 참고자료 콘프로스트 | 트랙백 | 덧글(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