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공용화론의 망상

2001년에 간행된 박노자 저 <우리들의 대한민국> 62~66페이지에 있는 내용입니다.





 한때 수그러들었던 영어공용화론이 최근 다시 머리를 들었다. 내가 보기에는 영어를 국가 차원에서 '제2국어'로 삼자는 말 자체가 논박할 가치도 없는 망상일 뿐이다. 그러나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그대로 믿는다면, 대학생 상당수가 이 '영어 국어화론'을 지지한다고 한다. 따라서 말할 가치도 없는 문제지만, 몇 가지 원칙론적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현대의 자유민주 사회에서는 언어도 이념,종교,대중문화 같은 정신적 사회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시장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즉, 언어는 그 원산지(또는 사용지역)인 특정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사회ㆍ경제적 위치에 따라 상품적 가치가 저절로 매겨진다. 한반도에 대한 영어권의 제반 영향이 많아짐에 따라 국내에서 영어 공부 열풍이 일어난 것과 같이, 앞으로 가령 중국어권의 비중이 부각된다면 어릴 때에 '천자문'부터 글을 배우는 옛 풍습이 부활할는지도 모른다. 즉, 이런 경향은 순수하게 시장논리에 속하는 것이므로 국가가 영어나 중국어를 '공용어'화할 하등의 필요성도 없다. 국가가 특정 종교에 특혜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특정 외국어를 공식화하는 것은 자유시장과 민주주의 원칙을 전면 부정하는 행정일 뿐이다.
 
 영어공용화론자들은 영어 구사력이 바로 국력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국민의 애국심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언어란 영어 구사 수준과 관계없이 오히려 한 나라의 국력 향상과 정비례하여 세계적으로 유포되는 것이 원칙이다. 일본은 영어를 제2국어로 삼지 않았지만, 일본어는 이미 구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국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아직은 환상처럼 느껴질 테지만, 멀리 내다본다면 앞으로 한글의 세계화도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영어 구사력이 나라의 대외경쟁력에 과연 그만한 영향을 미치는지 의문스럽다. 대외접촉을 업무로 하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영어나 다른 필요한 외국어를 잘 배울 것이고, 현장 근로자들까지 높으신 영어권 손님을 자주 대접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어의 공용화는 엄청난 예산 낭비(일체 공문의 영역 등)를 의미하는데, 이 자금을 차라리 교육에 투자하여 사립대학 예산의 학생 등록금 의존율을 낮출 수 있다면 국력 신장과 나라의 미래에 좀더 보탬이 될 것 같다.

 영어공용화론자들은 보통 한국의 '선진화'와 '영어화'를 동일시하려고 한다. 서구의 비영어권 국가 주민들이 영어 구사력 분야에서 표준적으로 한국인들을 어느 정도 능가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영어공용화론자들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다. 유럽인들의 영어 실력은 높은 경제적 수준과 여가문화의 발전에 따른 심화된 외국어 교육의 산물이지, 경제적 발전의 원인이나 원동력은 전혀 아니었다. 서구의 복지국가에서처럼 여기에서도 교사가 국비로 현지 어학연수를 정기적으로 다녀올 수 있고 한 반의 학생수가 15~20명에 불과하면, 영어의 공용화 없이도 졸업자의 외국어 실력은 당연히 지금보다 나을 것이다.

 오히려 서구 국가들은 대부분 영어의 실제적인 확산을 고려하여 프랑스처럼 국가적인 차원에서 자국 언어와 문화를 보호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쓸 뿐이지 '영어공용화'를 꿈꾸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 경험과 유럽을 다녀온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자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여 영어를 할 줄 알면서도 대답은 자국어로 하는 경우마저 허다하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국민이 각자 경제적인 차원에서 결정해야 할 외국어 습득 문제까지 국가가 정책으로 결정한다면, 이는 '선진화'가 아니라 중세적인 부역제도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사대주의적인 충성심으로 가득 찬 '조공국'이 '종주국'언어 구사를 일체의 '신민'들에게 의무화하는 꼴이다. 종주국으로서야 기분 좋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부담을 하나 더 안게 된 '백성'들로서는 무거운 노역으로 보일 것이다.

 이 '영어공화국'의 망상은 실천에 옮겨질 것 같지 않지만, 일단 옮겨진다면 몇 가지 심각한 결과를 낳을 게 뻔하다.

 첫째, 통일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영어를 배울 형편이 안 되는 대다수 북한 주민들과 '국제화한'남한인들 사이의 이질성이 더 심화될 것이다. 실제적인 남ㆍ북간의 소외도 그렇지만, 사회심리상으로도 북한 주민에게 '미제 식민지 남한론'이라는 주체사상의 주장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꼴이 될 것이다. 결국, 역설적으로 영어공용화를 주장하는 남한의 친미파가 주체사상의 들러리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
 
 둘째, 국내인들마저 한글을 등지면 해외 한인들의 현지 동화 과정이 더 촉진될 것이고, 세계 한인 공동체의 이상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그러나 세계 한인들의 연대야말로 한반도의 상대적인 고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아니겠는가. 해외 한인들의 동질성 유지는 한글 교육 장려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영어공용화론자들은 이를 무시한다.

 셋째, 한국 공교육의 현주소를 고려하면, 영어의 '국어화'로 고비용의 영어학원 사교육과 현지 영어연수가 젊은층에게 사실상 의무화될 것이다. 한국 학원가와 미국 대학가는 호황을 구가하겠지만, 고비용을 부담하지 못할 빈곤층은 삼류시민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빠른 속도로 양분화되어 가는데, 나라의 미래를 위협하는 이 과정이 더 촉진될 것이다.

 북한 주민과 빈민을 소외시키고, 모국과 해외동포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이 '영어공용화'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한국 사회를 주름잡고 있는 영어권 유학파가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영구화하려는 것인가? 단기적인 이득에 눈이 먼 재벌들이 중세적인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여 사원의 영어교육에 국가권력까지 동원하려는 것인가? 어쨌든 이 '영어공용화' 논쟁은 한국 지배층의 의식상태를 매우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비유를 하나 더 덧붙인다면, 사람은 누구나 어른이 되면 부모의 슬하를 떠나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부모를 버리고 멸시하는 자보다 부모 공양을 게을리하지 않는 자가 사회에서 더 나은 대접을 받게 되어 있다. 우리 모두의 부모인 선조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물론 민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세계인으로서 생활해야 하지만, 우리 뿌리를 스스로 존중해야 남들도 우리를 존중할 것이다. 

by 스텔스좀비 | 2008/01/24 00:47 | 참고자료 콘프로스트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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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時水 at 2008/01/24 11:56
그나저나 국어를 어떻게 '영어'로 가르칠 수 있는지 궁금함.
Commented by 스텔스좀비 at 2008/01/24 21:36
뭐, '미국학교 한국어 강좌'이런 뻘소리가 나올 것 같으나... 선생이나 학생이나 둘 다 개관광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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